2020. 6. 30. 아래 내용은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 [링크] 을 새로운 블로그로 옮긴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이전 블로그에서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무성애를 다루는 글에서 자주 보이는 그림자료 하나가 있습니다. 이건데요.
“에이븐에서 4가지의 무성애 유형이 있다고 밝혔다”고 하는 그림입니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중앙일보에서 무성애를 다룬 2012년 기사(http://news.joins.com/article/9206767)에서 이 그림이 처음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만들었겠군요. 하여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림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가지고 자신이 무성애자인지 고민하시는 분들도 꽤 많죠.
(http://tip.daum.net/question/84098765)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park&wr_id=44166724)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그림은 에이븐(AVEN)에서 폐기한 지 오래된 무성애 분류 모델을 사용하고 있을 뿐더러, 무성애를 왜곡하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있는 자료입니다. 왜 그런지 하나씩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림에 나와 있는 내용의 원 출처가 된 무성애 분류 모델을 에이븐을 포함한 무성애자 커뮤니티에서는 ‘ABCD 모델(ABCD Model)’이라고 그러는데, 에이븐은 해당 모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분류 체계는 폐기되었는데, 무성애자들 전부가 자신이 이 네 타입 중 하나라고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로 이 개념들은 여전히 참고하기에 유용하기는 하다.”
(http://www.asexuality.org/wiki/index.php?title=ABCD_types)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원래의 ‘ABCD 모델’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델에서는 무성애자를 분류하기 위해 세 가지 축을 사용했습니다. ‘성욕(성적 충동)’, ‘끌림(Attraction)’, ‘성적관계를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입니다.
- Type A : 성적충동(Sex Drive)을 느끼지만, 끌림은 느끼지 않음.
- Type B : 로맨틱끌림(Romantic Attraction) 혹은 다른 형식의 끌림은 느끼지만, 성적충동은 느끼지 않음.
- Type C : 성적충동과 로맨틱끌림 또는 다른 형식의 끌림을 느끼지만, 그 두 개가 연결되지 않음.
- Type D :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음.
그런데 이런 식의 분류는 결점이 있습니다.
1. 이 모델은 무성애자를 로맨틱끌림의 유무와 성욕의 유무로만 구분하고 있어서, 매우 이분법적(Binary)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양상의 무성애자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무성애자 중에는 회색무성애자(Gray-asexual)나 반성애자(Demisexual)같이 유성애자와 무성애자의 사이에 있는 무성애자들이 있습니다. 후술하겠지만 회색무성애자나 반성애자 같은 무성애자들은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성적끌림을 느끼고, 그렇게 성적끌림을 느낀 상대방과 성적관계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다양한 형태의 무성애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ABCD 모델은 이러한 무성애의 다양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이 모델을 참고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앞서 나온 “무성애자들 전부가 자신이 이 네 타입 중 하나라고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 성욕(Sexual Desire)의 유무로 무성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무성애는 성욕의 유무가 아니라 성적끌림(Sexual Attraction)의 정도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욕은 성적인 만족을 충족하기 위한 모든 욕구를 의미하며, 성적끌림이란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과 성적인 접촉을 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성욕의 하위 범주로 성적끌림이 있으므로, 이 둘은 같은 영역에 있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층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성적끌림이 없으면 무성애자고, 성적끌림이 특수한 상황에서만 생기면 회색무성애자 혹은 반성애자이며, 성적끌림이 있으면 유성애자입니다. 성욕의 유무로 무성애를 판단하는 인식은 여러 무성애자 커뮤니티들이 막 형성되던 2001~2002년에 커뮤니티 내부에서 제기되었는데, 문제가 많아서 현재 이런 경향은 사라졌습니다.
3. ‘다른 형식의 끌림’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끌림을 의미하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이 만들어질 당시, 에이븐을 비롯한 무성애자 공동체에는 사람이 느끼는 끌림(Attraciton)이라는 감정을 전반적으로 설명해주는 독자적인 모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에이븐에서는 끌림을 ‘성적끌림(Sexual Attraciton)’, ‘로맨틱끌림(Romantic Attraction)’, ‘관능적끌림(Sensual Attraciton)’, ‘미적끌림(Aesthetic Attraction)’ 등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ABCD 모델은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성애 커뮤니티에서는 무성애와 관련된 이런저런 담론들이 한창 논의되다가 결점들이 발견되어 사라지거나 폐기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철 지난 자료를 지금도 통용되는 자료인 양 생각하는 실수야 누구나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넘겨짚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올린 그림의 내용은 번역조차 잘못되었으며, 아예 원문에 있지도 않은 내용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림의 내용은 무성애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저 그림의 문항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 성욕은 느끼지만 상대방과 성관계를 원치 않는 경우
: 큰 문제가 없는 항목입니다. 원문 ‘ABCD 모델’의 ‘Type A’ 항목을 옮겨 놓은 항목이니까요. 성욕이 있지만 성적끌림이 없는 무성애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 감정적으로는 끌리지만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 ‘로맨틱’이라는 말은 단순히 ‘감정적’이라는 번역으로 치환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로맨틱한’ 감정이나 ‘로맨틱한’ 상황의 범위와 의미는 모두 다르니까요. 실제로 에이븐에서는 로맨틱끌림을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일단은”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감정으로 정의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대는 ‘Romantic Attraction’이라는 말을 ‘로맨틱끌림’으로 일관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항목을 정확하게 쓰자면 ‘로맨틱끌림을 느끼지만~’이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무성애는 성욕의 유무가 아니라 성적끌림의 정도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욕’이 아니라 ‘성적끌림’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이렇게 두 부분에서 설명을 제대로 해야 이 항목이 무성애자 중 한 분류인 로맨틱 무성애자(Romantic Asexual)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게 되겠죠.
◈ 성을 혐오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
: 무성애자 중 많은 수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성적행위나 유성애자의 성생활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반(反)성애주의(Antisexualism)와 무성애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반성애자(Antisexual)가 모두 무성애자인 것도 아닙니다. 많은 무성애자들은 섹스를 포함한 성적행위를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잣대로 부정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유성애자들이 성적관계를 통해 즐거움이나 만족을 얻는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무성애자 중 개인적인 사정이나 가치관 때문에 성적관계를 불쾌하거나 역겹게 생각하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성적인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아포씨섹슈얼(Apothisexual)로 정체화하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모든 무성애자가 그렇지는 않으며, 많은 이들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성적관계에 참여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이상 합의 하의 성적관계를 긍정적으로(Sex-positive) 생각합니다. 실제로 에이븐에서는 무성애자가 성에 대한 것들을 혐오한다는 잘못된 인식에 대항하기 위해 ‘섹스긍정주의(Sex-positive Movement)’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앞서 설명했듯이 성과 관련된 것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반(反)성애자라고 따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유성애자 중에도 금욕주의 같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성에 대한 이야기나 성적행위를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성과 관련된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이 사람들이 ‘무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성애는 금욕주의가 아니며, 성에 대한 금욕주의나 개인적인 혐오감은 무성애를 이해하는 데 어떠한 기준도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금욕주의는 신념이나 신조인데, 무성애는 한 사람의 고유한 성지향성이기 때문입니다.
◈ 성욕도 느끼고 감정적으로도 끌리지만 신체적인 성관계만 거부하는 경우
: 이 항목은 성적끌림이 없다는 점이 ‘신체적인 성관계에 대한 거부’와 사실상 등치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성애를 성욕의 유무나 성적관계의 유무로 판단하는 전형적인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 무성애는 성욕의 유무가 아니라 성적끌림의 정도로 판단해야 합니다. 또한 무성애자 중에서도 유성애자인 연인의 성욕을 만족시켜주거나, 육체적 쾌감을 느끼려고 등 성적끌림 외의 이유로 성적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욕의 유무나 성적관계의 유무는 무성애를 판단하는 데 아무런 지표가 되지 못합니다. 이 항목에 들어가야 할 정확한 표현은 "~성적끌림이 없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성욕이 있는 로맨틱 무성애자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게 되겠죠.
그리고 1번 항목에서는 “성관계를 원치 않는 경우”라고 비교적 적절하게 써 놓고는, 왜 4번 항목에서는 “성관계를 거부하는 경우”라고 오해가 일어날 만한 표현을 써 두었는지 의아합니다. ‘원하지 않다(마음이 없다)’는 말과 ‘거부한다’는 말의 뉘앙스는 다릅니다. 감정적인 끌림이 없을 때 성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은 성관계를 원치 않는 것이고, 감정적인 끌림이 있을 때 성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은 성관계를 ‘거부하는’ 행동인가요? 결국 이 항목은 소위 ‘감정적인 끌림’이 결국에는 ‘성적끌림’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유성애중심적인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그림은 무성애를 왜곡하는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그림으로 무성애자를 이해하거나, 자신이 어떤 무성애자인지 판단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현재 에이븐을 포함한 무성애자 커뮤니티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무성애의 분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좀 더 편하게 보시려면, 무:대 블로그에 올라 와 있는 이 글(http://acetage.com/220768284340)을 보셔도 됩니다.
◈ 성적끌림의 정도를 기준으로
- 유성애자 (Sexual, Allosexual) :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 회색무성애자 (Gray Asexual, Gray A) : 성적 끌림을 적게 느끼는 사람, 혹은 성적 끌림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성적 관계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문 사람.
- 무성애자 (Asexual) :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
◈ 성적끌림의 양상을 기준으로
- 반(半)성애자 (Demisexual) :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낀 대상에게만 성적끌림을 느끼는 사람.
- 오토모노섹슈얼 (Automonosexual, Autosexual) : 자기 자신에게 성적끌림을 느끼는 사람. 그렇다고 단순히 자위만 한다고 오토모노섹슈얼인 것은 아님.
- 자기부재성애자 (Autochorisexual, 오토코리섹슈얼; Aegosexual, 에이고섹슈얼) : 대상에 대해 성적욕구를 느끼되, 그 성적욕구를 대상과의 행위로 연결시키지 않는 사람.
◈ 로맨틱지향성, 즉 타인에 대한 로맨틱한 지향성을 기준으로 무성애자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무로맨틱 무성애자 (Aromantic A-) : 아무에게도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음.
- 이성로맨틱 무성애자 (Heteroromantic A-) : 다른 젠더나 성에 로맨틱한 끌림을 느낌.
- 동성로맨틱 무성애자 (Homoromantic A-) : 같은 젠더나 성에 로맨틱한 끌림을 느낌.
- 양성로맨틱 무성애자 (Biromantic A-) : 둘 혹은 그 이상의 젠더나 성에 로맨틱한 끌림을 느낌.
- 범성로맨틱 무성애자 (Panromantic A-) : 젠더에 관계없는 로맨틱한 끌림을 느낌.
작성: 모래미
검수: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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