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성애자 퀴어 이슈

케이가 만든 소위 <끌림모델>의 내용과 악용사례에 대한 비판

2020. 7. 17. 아래 내용은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 [링크] 을 새로운 블로그로 옮긴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이전 블로그에서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케이가 만든 소위 <끌림모델>의 내용과 악용사례에 대한 비판

작성자: 뚜벅쵸(무:대), 시우(승냥이카페)
 

 

 

1. <끌림모델>이란 무엇인가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무성애자 커뮤니티인 승냥이카페의 많은 회원들은 소위 <끌림모델> 이론을 일상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카페 내외에서 <끌림모델>을 권위 있는 이론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전 매니저 케이의 행보 때문일 것입니다. 케이는 정모를 포함한 모든 오프라인 모임에서 회원들에게 <끌림모델>의 사용을 사실상 강제해왔습니다. "그건 미적끌림 같은데요?" 처럼 개인의 정서를 재단하는 표현을 자주 사용해왔고, "그건 (닉네임)님이 세미나를 안 들어서 그렇죠!" 등 회원 모두가 <끌림모델>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고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닉네임)님이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죠!”라며 <끌림모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를 전면적으로 저지해왔습니다. 또한 케이가 <끌림모델>을 퀴어문화축제에선 리플렛의 형식으로, 행성인에선 강연의 형식으로 다양하게 홍보해 왔다는 사실과 511명의 후원으로 출판에 성공한 ACE STORY 2권이 사실상 필진의 글을 케이가 <끌림모델>에 들어맞게 피드백하여 진행한 결과물이란 것을 고려하였을 때 <끌림모델>은 승냥이카페 회원을 넘어서 무성애에 관심을 가지는 불특정다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2.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모델

 

그러나 실제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런 모델은 전혀 논의되거나 알려진 바 없습니다. 케이가 자주 언급해온 세계적 무성애 가시화 단체 에이븐(Asexual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 AVEN)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에이로그팀에서 활동한 이들의 증언을 비롯한 앞뒤 정황을 볼 때, 기존에 알려진 끌림과 욕구에 대한 개념에 케이가 자의적으로 몇 가지 내용을 덧붙이고 <끌림모델>이라는 이름만 붙여 퍼뜨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소위 <끌림모델>은 특히 두 가지 면에서 기존의 끌림 담론과 차이를 보입니다.

하나는 본능과 욕구를 구분하고 본능을 “쾌락을 느끼고자 하는 소망”이며 지향성에 관계없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욕구를 “본능이 실체화된 모든 형태”로 정의한 것입니다. 반면 기존 담론에서는 끌림을 단순한 욕구와 구분하기는 하지만 본능을 굳이 욕구와 분리하여 별개의 개념으로 말하거나 모든 욕구의 근원으로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리비도(libido), 성적욕구(sexual desire), 성적충동(sexual urge) 등의 단어가 모두 혼용되며, 조금씩 뉘앙스는 다르지만 결국 같은 스펙트럼 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지향성에 관계없이 모두가 가진’ 무언가를 상정하지도 않습니다. 가령 지금도 무성애자 논리비도이스트(asexual nonlibidoist)로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에게 성적본능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큰 실례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끌림을 “정서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애매한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이븐 위키(AVENwiki)를 보면 끌림은 “사람들을 끌어당겨 모이게 하는 정신적이거나 정서적인 힘(a mental or emotional force that draws people together)”이고, 성적끌림은 “유성애자가 종종 느끼는 정서적 반응으로, 끌리는 상대와 성적접촉을 하고 싶은 욕구로 이어진다(an emotional response that sexual people often feel that results in a desire for sexual contact with the person that the attraction is felt towards)”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즉 끌림 자체가 해당하는 개인이 느끼는 정서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끌림 개념은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attraction의 개념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힘’은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을 억지로 움직이거나 조종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특정한 현상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끌림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요인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반면 이 <끌림모델>은 끌림을 “정서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힘”으로 정의하고 이 힘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끌림 자체는 정서와 별개이며 사람의 욕구를 외부에서 부채질하는 존재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3.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사실 무성애 담론은 이제 막 나타난 것이므로, 명확히 정해지거나 증명된 것은 없습니다. 지금도 무성애와 여러 성지향성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단어와 이론, 모형들이 수없이 논의를 거쳐 나타나고 사라지거나 변형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끌림모델>이 끌림에 대한 기존의 설명과 다르다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자의적으로 내용을 덧붙여 만든 모델을 홍보하는 데 기존 담론의 권위를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끌림모델>을 소개한 리플렛에서는 에이븐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고, 에이븐에서 나온 끌림개념이라며 네 가지 끌림을 각각 어떠어떠한 “정서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소개합니다. 에이븐에서 흔히 쓰이는 개념과는 명백히 다른, 케이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정의를 에이븐의 이름과 권위를 빌어 퍼뜨린 것입니다. 또한 에이븐에서 “사람이 느끼는 끌림을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명백한 오도입니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수많은 끌림의 종류가 논의되고 있으며, 에이븐 위키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성적끌림과 로맨틱끌림, 관능적끌림(감각적끌림), 미적끌림을 들고 있을 뿐 인간의 끌림에 네 가지만 존재한다고 정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특히 관능적끌림(감각적끌림)과 미적끌림의 개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으며, 미적끌림은 아예 배제하고 다른 종류의 끌림들을 소개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즉 케이는 끌림에 대한 본인만의 해석을 에이븐이 공인한 이론인 양 홍보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케이가 자의적으로 덧붙인 내용들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끌림과 관련 개념들을 정의하는 데 있어 ‘본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끌림을 “정서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소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해당 끌림을 느끼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가리고 축소합니다. 끌림은 스스로가 느끼는 정서이므로 욕구와 마찬가지로 이것을 느끼는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조절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데, ‘힘’과 ‘정서’, ‘욕구’를 분리함으로써 개개인의 정서와 욕구를 ‘끌림 탓’으로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승냥이카페 내에서는 “나는 (닉네임)님에게 파트너적 로맨틱 끌림을 느껴요.” 등 지나치게 재단된 끌림표현이 기형적인 형태의 플러팅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더 극단적인 예로, 소위 <끌림모델>을 만들어 퍼뜨린 장본인인 케이는 자신과 연애나 다른 긴밀한 관계에 있지 않은 특정 카페 회원의 얼굴 사진을 자신의 휴대전화 배경으로 설정해두고 “내가 미적끌림을 느끼는 외모이다.”라고 말하며 공공연히 보여주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기존의 언어로 표현했다면 스토킹이나 성희롱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자신이 자의적으로 만든 끌림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악용해 책임을 회피한 것입니다.

 

 

4. 결론

 

케이는 소위 <끌림모델>을 완전무결한 이론처럼 홍보하며 그 사용을 강제하고 해당 모델을 이용해 타인의 경험을 재단해 왔습니다. 이는 <끌림모델>처럼 근거 없고 오해할 만한 이론이 아니라 그 어떤 퀴어의 경험에 관한 이론을 가지고도 해서는 안 될 행동입니다.

위에도 쓴 것처럼 무성애 담론은 신생 담론으로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모든 개념에 대하여 누구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정서는 칼로 자르듯 명확히 나눌 수 없는 드넓은 스펙트럼 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개인의 경험에 대해서 이름짓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이 글을 계기로 외부의 권위있는 이론처럼 보이는 것에 의해 자신의 경험이 함부로 재단되고 있지는 않은지, 단순히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자신의 경험을 잘라 그 언어의 틀에 끼워맞추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씩 생각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