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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애자 퀴어 이슈

고려대학교 인권강연회 무:대 발제문

2020. 7. 17. 아래 내용은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 [링크] 을 새로운 블로그로 옮긴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이전 블로그에서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2017년 5월 30일 고려대학교에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중앙 성소수자 동아리 '사람과사람' 등의 주최로 인권강연회가 열렸습니다. 인권강연회의 두 번째 강연은 "성소수자의 이야기에서 제외되는 무성애자와 트랜스젠더퀴어를 조명하는" 강연이었는데, 여기서 무:대의 이평과님과 만웨님이 공동으로 발표를 맡으셨습니다. 아래는 두 분의 발제문입니다.

 

 

 

 

 

 

무성애에 대하여

 

이평과

 

 

무성애자(Asexual)은 성적끌림(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무성애자들이 가진 정체성을 무성애(Asexuality)라 부르고 무성애는 성적끌림을 느끼지 않는 정체성을 말한다. Bogaert(2004, 2012)는 무성애자를 그 어느 성(Sex)에 대해서도 성적끌림의 부족을 느끼거나, 타인을 향해 성적끌림을 느끼는 주체가 아닌 사람이라 정의하고 그런 정체성을 무성애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끌림은 성지향성을 결정하는 중심 요소로 (Bogaert, 2003; Brotto, L. A. & Yule, M., 2016에서 재인용) AVEN(2017)에서는 이것을 ‘어떤 사람과 성 접촉(Sexual contact)을 하여 성(Sexuality)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정의한다. Yule 등(2015)에 의하면 이 성적끌림은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는 측면이다.

성적끌림의 정의에 따르면 성적끌림은 외부에서 관측하기 어려운 측면이다.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구이기 때문인데, 이 점을 간과하게 될 경우 행위를 보며 무성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이 경우는 성행위(Sexual behavior)를 기준으로 무성애로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성행위를 하게 하는 요소로 성적끌림이나 성욕 등이 있을 수 있으나 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므로 성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유성애자라 단정할 수는 없다. 또 성행위를 하지 않는 이유도 다양할 수 있다. 성행위의 대상이 없다든지 개인의 신념, 예를 들면 종교적 이유로 하지 않는다든지 등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성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무성애자라 단정할 수 없다.

성적끌림은 성욕(Sexual drive), 로맨틱끌림(Romantic attraction), 관능적끌림(Sensual attraction), 미적끌림(Aesthetic attraction) 등과 구분된다. 우선 성욕은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성적끌림과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Slob et al.(1996)의 연구에 의하면 월경 주기 중 난포기(Follicular phase; 여포기)에 있는 사람들이 황체기(Luteal phase)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성욕을 강하게 느꼈다. 이 연구는 사람이 성욕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지는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많은 사람들은 성욕이 없거나 현저히 낮은 사람을 고자 등으로 칭하며 모욕하려 한다. 또 무성애자에 대해 같은 의미로 고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상당하다. 이것이 무성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 경우를 차치하고서도 무성애가 성적끌림을 덜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성애자와 성기능장애가 있는 사람을 동일시하는 것은 성욕과 성적끌림을 동일시하고, 주된 주제는 아니지만 성기능장애와 성욕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무성애자에게 무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로맨틱끌림은 성적끌림과 구분되는 개념이다. 로맨틱끌림은 다른 사람과 로맨틱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 (AVEN, 2017) 로맨틱끌림이 성적끌림과 다른 개념이라는 사실은 자신이 성적끌림에 비해 로맨틱끌림을 많이 느끼거나 로맨틱끌림에 비해 성적끌림을 많이 느낀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성애 커뮤니티 밖의 많은 사람들은 성적인 요소를 배제한 사랑이나 성적인 요소를 배제한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을 “플라토닉”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 “플라토닉”이 다양한 매체나 예술 작품 등에서 묘사한 사랑과 비슷한 것이라면 그 감정 중 사랑하는 사람이라 성적인 접촉 및 상호작용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배제한 것이 로맨틱끌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적끌림과 로맨틱끌림은 서로 다른 것인데 이 경우가 결합한 경우가 많아 그 두 가지를 통해 구성한 정체성을 한 가지로만 인식하여 로맨틱지향성과 성지향성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것을 구분해야 하며 이것을 구분하게 될 때 무로맨틱과 무성애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무성애에 대해 감정이 없는 사람이나 로맨틱한 의미의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은 성적끌림을 다른 감정이나 끌림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연애를 오랫동안 하지 않았거나 하고자 하는 의향이 없는 경우를 무성애라 일컫는 것 또한 로맨틱끌림을 위시한 로맨틱한 감정과 성적끌림을 구분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관능적끌림은 성적이지 않은 신체접촉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한다. (AVEN, 2017) 그 외에도 상대와 감각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쾌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한다. (무:대, 2017) 관능적끌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어떤 사람의 뺨이 촉감이 좋은 편일 때 주변인이 뺨을 만지고 싶어하는 욕구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욕구가 성적인 함의와 욕구를 항상 수반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성적끌림이 관능적끌림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관능적끌림이란 단어를 직접 사용할 때 성적끌림과 구분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나 실제 상황에서는 구분이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유성애적인 의미에서의 애인 사이이고 두 사람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뒤에서 껴안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고 하자. 이 경우 성적끌림에 의한 것인지 혹은 관능적끌림만 관여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적끌림은 외모에 대한 끌림으로 성적이거나 로맨틱한 감정이 포함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AVEN, 2017) 이성애자 여성이 여성 아이돌 그룹의 사진을 보며 예쁘다고 감탄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것이 미적끌림은 느끼지만 성적끌림은 느끼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적끌림 또한 관능적끌림과 마찬가지로 정의 자체로는 쉽게 구분할 수 있으나 미적끌림을 느낀 대상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른 끌림과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 * *

 

 

 

왜 무성애에 주목하는가?

 

만웨

 

 

인권주간의 발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찾아보게 된 것은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인권에 대한 다양한 선언문들과 정의였다. 이들을 찾아 종합해보면 인간다움과 보편에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자연스럽게 인간다움과 보편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역사적으로 의문은 다름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 그 자체가 사회·정치·경제 등의 인간 행동의 산물에 대해 제한받지 않는다는 인식의 개선으로 점차 이어져왔다. 인권 선언문들과 정의는 그 의문들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성소수자의 인권을 다루면서 우리는 성소수자의 주요한 다름인 신체적 성(Sex), 사회적 성(Gender), 로맨티시티(Romanticity), 섹슈얼리티(Sexuality)에 주목해왔다. 이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고 새로운 개념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이분법적 논리는 도전받는다. 그 시작은 동성애를 주제로 한 담론이었으며, 이후에 트랜스젠더와 양성애로 범주를 확장한다. 이성연애와 결혼 등의 남과 여의 정상성에 기반을 둔 행동에 대한 붕괴가 일어나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 단계다.

이후 성소수자 담론은 사회적 성과 섹슈얼리티를 탐구하면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동성애, 이분법적 양성애 같은 지칭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레즈비언 사회에서 펨과 부치라는 표현이 한계를 가지는 것을 예시로, 기존의 이분법과 그 단어로는 아직 성소수자의 개개인의 사회적 성과 섹슈얼리티를 표현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다. 이런 유인에 따라 트랜스젠더 개념은 FTM, MTF에서 성별이분법적이지 않은 안드로진, 팬젠더, 에이젠더, 젠더플루이드 등을 포괄하는 젠더퀴어 이론으로 확장된다. 마찬가지로 양성애에 대한 개념도 초기에는 남·여 양성에 대한 성적지향으로 시작했으나, 이후엔 둘 이상의 다른 젠더에 대한 성적지향을 가지는 다양한 유형의 정체성들의 포괄어로서 성장한다.

위와 같이 남과 여의 정상성에 기반을 둔 행동에서 성별이분법과 정상성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담론이 진행되어왔다. 나아가 무성애는 성애 그 자체가 가지는 정상성에 대한 담론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성적끌림의 유무에 주목하는 무성애 담론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유성애적 성적지향들의 여집합인 무성애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었으며 포괄성 해소를 위해 담론은 끌림 유형의 구분과 다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미적끌림, 관능적끌림, 로맨틱끌림, 성적끌림이라는 구분과 동시에 로맨틱끌림과 성적끌림이 없거나 다르게 느껴진다면 어떤 양상으로 그러한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끌림의 구분’을 통해 동성로맨틱 무성애자와 같은 로맨틱지향과 성적지향을 구분하는 정체화가 등장하고, ‘끌림 양상의 다름’을 통해 회색무성애자, 반성애자, 오토코리섹슈얼 등의 표현 외에도 로맨틱지향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는 다양한 접두어들이 등장한다.

무성애 담론은 그 당사자성에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다. 성애에 대해 괴리감을 느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 중에서는 퀘스쳐너리로 남는 경우도 있으며, 자신을 표현할 적절을 단어를 찾지 못하거나 자신이 무성애자로 정체화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기존의 정체화 상태에 머무는 경우도 존재한다. 의문 끝에 무성애자로 자신을 정체화한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의 당위성을 통해 소수자임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는 무성애자들은 성소수자 사회 안에서 무성애에 대한 몰이해와 그로 인한 차별의 경계에서 소수자 안의 소수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양성애 혐오와 유사하게 지배적인 논리가 닿을 수 없는 부분까지 과도한 확장을 하면 발생하는 문제이다. 이때 무성애자들은 내부적으로 연대하고 가시화에 힘씀으로써 성애의 정상성에 도전한다.

당사자성과 성소수자 담론의 확장을 바탕으로 한 무성애 담론은 더 구체화된 자신의 지향성 표현들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로맨티시티와 섹슈얼리티를 다룰 때 단순히 ‘있는가? 있다면 어느 방향인가?’를 넘어서서, ‘있는가? 없는가? 어느 정도와 방향으로 어떠한가?’로 나아가게 한다. 또한 이러한 표현들을 이해하고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해당 정체성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소통할 때 더 원활하고 정확한 방향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무성애 담론은 위와 같이 질문을 이어 나가며 존재를 포용할 수 있는 범주를 넓혀나가는 특성과 소통의 과정에서 작용하여 존재성을 견고히 하는 특성을 모두 가진다.

 

다양한 성소수자 담론들과 함께 무성애 담론도 현재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나는 중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비가시화된 무성애 담론의 특성상 다른 성소수자 담론에 비해 적극성이 부족하다. 포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힘과 동시에 정체성을 표현하는 단어가 적극적으로 생산되는 담론에 있어서, 그 부족한 적극성이 무색할 정도로 무성애 담론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우리가 특히 로맨티시티와 섹슈얼리티에 다룰 때 무성애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혹은 절대적으로 비가시화 상태에 머물러 있는 정체성들의 가시화와 함께 존재성을 확인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식 개선을 이루며 인간을 이해하는 지평과 포용성을 넓힘으로써 인권을 고취시키는 바탕이 될 것이다.